'중개 의학'의 심장에서 미래 의료를 설계하다
작성일 : 2026.05.14 16:43

거대한 병원 시스템 속에서 환자들은 대개 흰 가운을 입고 청진기를 든 임상의사를 떠올린다. 그러나 환자에게 투여되는 신약 한 알, 수술실에서 쓰이는 정밀한 진단 기법 뒤에는 병원의 가장 깊숙한 곳에서 밤을 지새우는 '과학자'들이 존재한다. 서울아산병원 융합의학과는 바로 그 지점에서 탄생한 국내 의과학의 선도적 모델이다. 
본지는 기초과학의 원천 기술을 실제 임상 현장으로 연결하며 '죽음의 계곡(Valley of Death)'을 메우고 있는 중개 의학자 탁은영 교수를 만났다. 기술로 시간을 벌고, 그 시간만큼 의사가 환자의 눈을 한 번 더 맞출 수 있 는 세상, 그 세상은 어떤 것일까.<강지명 기자>
 

중개 의학자', 낯설고도 필연적인 그 이름
서울아산병원  융합의학과(Department  of Convergence  Medicine)는  일반적인  진료  과목 과는  그  궤를  달리한다.  외래  진료실에서  환자를  진 단하고  수술을  집도하는  것이  임상의(Clinician) 의  역할이라면,  융합의학과는  그  너머의  영역을  탐구 한다.  탁은영  교수는  인터뷰의  서두에서  '중개  의학 (Translational  Research)'의  정의를  명확히  함으 로써 대화를 시작하였다.
"환자들은 항암제나 치료제의 옵션이 제한적인 상황에 놓일  수  있다.  물론  임상의들은  최선의  약제를  처방하 지만, 그 옵션이 바닥났을 때 그다음은 없는 경우가 종 종  발생한다.  그런  때를  대비해  신약을  개발하고,  질병 의  근본적인  기전(Mode  of  Action)을  분석하여  새 로운  비전을  제시하는  일,  그것은  임상  의료를  겸업하 며 감당하기에는 벅찬 영역이다."
그녀는  여기서  이른바  '죽음의  계곡'을  언급하였다. 실험실에서의  기초  과학적  발견이  실제  환자의  침상 (Bedside)까지 도달하지 못하고 소멸되는 간극을 의 미한다. 탁 교수는 이 간극을 메우기 위해 기초 과학자 와  임상  의사  사이에서  언어를  번역하고  목적을  정렬 하는 '중개 의학자'의 삶을 택하였다. 

 

중개 의학, 임상과 연구실을 이어주는 다리
중개  의료란  기초  연구실에서  얻은  성과를  임상  현장 (환자 치료)에 적용하고, 반대로 의료 현장에서 느끼는 미충족  수요(Unmet  Needs)를  연구  주제로  가져오 는 가교(Bridge) 역할을 의미한다.
"과학자의  언어와  의사의  언어는  다르다.  서로가  원하 는  니즈(Needs)가  다르기  때문이다.  이처럼  서로  다 른 두 집단이지만, 명확한 공통 목표가 있다. 환자의 삶 의  질  향상과  인류의  번영이다.  부동산  중개인이  땅과 사람을  이어주듯,  중개  의학자는  과학적  데이터와  환자의 생명을 이어준다." 탁 교수는 스스로를 이렇게 정 의했다.

 

아산병원의 융합의학과는 어떤 곳인가?
앞서의 언급처럼, 서울아산병원 융합의학과는 현대 의 학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기초과학,  공학,  임상  의학 을  결합하여  새로운  진단  및  치료  기술을  연구·개발하 는  곳이다.  단순히  환자를  진료하는  진료과가  아니라, 의사와  과학자가  협력하여  미래  의료  기술을  현실로 만드는  연구  중심  부서이다.  탁은영  교수와  같은  '중개 의학자'들이 일하는 중개 연구의 허브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융합의학과에서는  다학제  협력  역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역할이다.  의사뿐만  아니라  생명과학자, 공학자,  통계학자  등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이  모여 융합  연구를  수행하는  곳이기도  하다.  현재  이곳에서 는 다음과 같은 연구를 수행 중이다: 

실용 의공학의 산실, 그리고 미래 먹거리의 요람
이처럼  서울아산병원  융합의학과의  교수진과  연구원 들은  미래  정밀  의료  시대를  이끄는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이곳은  '환자에게  직접적으로  도움이 되는  실용적인  의료  기술을  개발하기  위해  공학과  의 학이 만나는 곳'을 핵심 모토로 한다. 

실제로  서울아산병원의  융합의학과  연구실은  일반  대 학의  연구실과  달리  병원  내에  위치하여  환자의  샘플 (생체  조직  등)이나  임상  데이터를  익명화하여  연구에 즉각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독보적인  환경을  갖추었 다. 이 같은 병원 기반의 연구는 연구자들에게 있어 굉 장히 우호적이고 중요한 디테일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아산병원의 산업화 지원 역시 빼놓을 수 없다. 연 구  성과가  논문에  그치지  않고  특허  출원,  기술  이전, 스타트업  창업  등으로  이어지도록  적극  지원하는  것 역시 서울아산병원의 큰 강점이다.

 

'Generation to Generation', 다음 세대를 위하여
탁은영  교수는  서울여자대학교에서  학부를  마 치고,  2005년  정부의  미래  인재  육성  정책인 MRC(Medical  Research  Center)  장학  제도를 통해 경희대학교 의과대학에서 석·박사 과정을 밟았다. 2010년도에  박사  학위를  받았는데,  당시  집중하던  연 구가 활성 산소와 관련된 연구였다. 이 연구에 대한 연 장선상으로,  그녀는  태평양을  건너  포닥(Post-Doc, 박사후연구원) 과정을 밟게 되었다. 2015년 그녀는 서 울아산병원에  부임하며  본격적인  중개  의학자의  길을 걷기 시작하였다.
탁  교수의  하루는  수술실과  실험실을  오가는  긴박한 일상의  연속이다.  중개  의학의  대표적인  자산은  환자로부터 기증받은 '시료(Sample)'다. 이를 확보하기 위 해  그녀와  팀원들은  수술  일정에  맞춰  전날부터  동의 서를 검토하고 대기한다.

"수술장에서  환자의  조직이나  혈액이  나오는  순간,  우 리는  스탠바이를  하고  있어야  한다.  간이식과  같은  대 수술  현장은  그  분위기  자체로  압도적이다.  실제로  처 음  들어온  석사  연구원은  그  긴장감에  기절할  정도로 현장은 치열하다. 하지만 그곳에서 얻은 환자의 샘플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연구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채취된  시료는  즉시  뱅킹(Banking)  과정을  거친 다.  이후  가설을  증명하기  위한  지난한  실험이  이어 진다.   'Loss  of  Function(기능  상실)'과  'Gain  of Function(기능  획득)'  연구를  통해  특정  유전자가  질 병에  미치는  영향을  제어하며  신약  개발의  리드  히트 (Lead Hit)를 발굴하는 기초를 쌓는 것이다.


"신약 하나가 개발되어 임상 1, 2, 3상을 통과하기까지 는  엄청난  시간과  자본이  투입된다.  누군가는  그  성공 의 열매를 따먹겠지만, 누군가는 그 길을 가기 위한 레 퍼런스와  근거(Evidence)를  남겨야  한다.  본인은  후 자의 길을 걷고 있다. 거창하게 말해 'Generation to Generation',  다음  세대  과학자들을  위한  이정표를 세우는  작업이다."  그런  과정이  고되지  않냐는  기자의 물음에, 탁 교수는 덤덤하게 대답했다.

 

가슴 속 태극기를 품은 과학자
바로 위의 내용처럼, 탁 교수의 대화에서 유독 눈에 띄 는  대목은  '사명감'에  대한  강조였다.  30대  후반에서 40대  초반의  젊은  교수임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내면 에는 6.25 전쟁 이후 한강의 기적을 일궈낸 세대에 대 한 감사함, 그리고 후대에 대한 책임감이 서려 있었다. "본인은  우리나라  정부의  장학금과  국민의  세금으로 공부했다.  미국  유학  시절,  자연스레  마음속에  태극기 를  품고  있었다.  아무도  나에게  국가대표라고  말해주지  않았지만,  스스로가  대한민국을  대표해  이곳에  있 다고  믿었다.  언젠가  한국으로  돌아가  본인의  모든  지 식과 리소스를 쏟아부어 대한민국 의학 발전에 이바지 하는 것이 그 시절의 목표였다."
그녀는 "어쩌면 나는 '젊은 꼰대'일지도 모른다"라며 웃 어  보였지만,  그  눈은  진지하였다.  자신의  뿌리를  알 고,  자신이  받은  혜택을  사회에  환원하고자  하는  의지 는 그녀가 매일 아침 눈뜨게 하는 동력이다. 이러한 철 학은  그녀의  삶의  태도에도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다. 자기가  공부를  썩  잘하지  못했다고  겸손해하면서도,  ' 꾸준함과  끈기',  '근성'이라는  단어로  자신의  삶을  요약 하는 모습에서 그 어떤 천재성보다 가치있는 생존력과 전문성이 보였다.


삶이라는 이름의 '핵융합', 융합의학과에서의 완성
탁 교수가 의과학자의 길을 걷게 된 계기는 뜻밖에도 인 문학적이고  추상적인  질문에서  시작되었다.  10대  시절 부터  그는  '생명이란  무엇인가',  '인간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와 같은 근원적인 질문에 몰입하였고 한다.
"사람이  태어나기  위해서는  세포와  세포가  만나  일어 나는  핵융합의  과정이  필요하다.  모든  장기와  조직은 결국 세포 하나에서 시작된다는 사실이 본인을 매료시켰다. 이것이 의과학에 관심으로 이어진 것 같다. 서울 아산병원에서  일하는  순간순간,  맞는  자리에  맞는  옷 을 입은 느낌이 드는 것은 그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는  과학자  특유의  이성적인  분석력을  갖추었으면서 도,  대화  중간중간  서정적이고도  문학적인  표현들을 사용하였다.  이는  그가  단순히  기술적인  연구에  매몰 된  학자가  아니라,  인간과  생명에  대한  인문학적  성찰 을 겸비하했음을 얘기해주는 듯 했다.

 

'연구자 탁은영'이 바라보는 길


교수로서  이루고자  하는  목표는  무엇이냐는  질문에 여전히 그녀는 스스로의 본분으로 정의한 길을 벗어나 지 않았다. "미국을  비롯한  글로벌  선진  의료  체계는  이미  MD- PhD  트레이닝  제도를  통해  'Physician-Scientist' 를  체계적으로  양성하며  의학  혁신을  주도하고  있다. 본인  또한  국내  의료  현장에서  주니어  임상의사들이 환자에게  가장  실질적으로  필요한  질문을  던지고,  과 학적  근거를  바탕으로  정밀한  치료  해답을  도출할  수 있는 전문성을 갖추도록 이끄는 이정표가 되고 싶다."


그녀는 임상 현장의 절박함과 기초과학의 논리적 시각 을  동시에  갖춘  조력자로서,  기초와  임상  사이의  언어 적,  학문적  간극을  좁히는데  헌신하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  연구실의  발견이  환자의  침상으로  이어지는  그 접점에서,  사람을  살리는  과학과  현장을  잇는  견고한 가교가 되는 것이 연구자이자 교육자로서 본인이 실현 하고 싶은 궁극적인 소명이다. 
그녀의  인터뷰로,  우리는  의료의  진정한  의미를  다시 금 되새기게 된다. 화려한 무드 조명 아래 주인공은 아닐지라도, 그 무대를 이루는 숨은 헌신 없이는 그 어떤 기적도 일어날 수 없다. 탁은영 교수 역시 그런 찬사를 받기에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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